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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무언의 가르침

  오랜만에 신문에서 훈훈한 기사를 읽었다. 경남 양산시 통도사 자장암에 놓인 시주함에 누군가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와 함께 현금 200만원을 넣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27년 전 그 시주함에서 3만원을 훔치려 했던 사람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어린 소년이 시줏돈을 훔치러 갔다 스님에게 들켰던 모양이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던 IMF 외환위기 시기라 사찰의 시주함이 털리는 일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편지는 “어린 시절 생각이 없었습니다. 27년 전에 여기 자장암에서 시주함을 들고 산으로 가 통에서 돈을 꺼냈습니다. 약 3만원 정도로 기억납니다”로 시작됐다. “그런데 한 스님이 제 어깨를 잡고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셨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졌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글 말미에는 “곧 아기가 태어날 거 같은데 아기에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날 스님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주함을 도둑질하다 스님에게 들켰지만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간 그 소년은 그날의 일을 혼자 간직한 채 예비 아빠가 된 것이다. 그리고 27년 후 다시 그곳을 찾아 시주함에 편지와 함께 현금 200만원을 넣은 것이다. 떳떳한 아빠가 되기 위한 다짐이었다.     그때 소년의 어깨를 잡았던 스님은 지금도 자장암에 있는 현문 스님이라는 분이다. 현문 스님은 “그 무렵 IMF로 사람들이 너무 힘든 것을 알았기에 소년을 그냥 보낸 후 그 일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날 ‘사건’은 소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습니다. 스님이 주문을 넣어서 착해진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에 쓴 걸 보면 스님의 무언의 큰 가르침이 소년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 것 같다. 만약 스님이 소년을 경찰에 넘겼다면 그는 세상을 원망하며 더 깊은 범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현문 스님은 손편지에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돌아온 감동적인 사연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불에 등장하는 장발장과 미리엘 신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 장발장은 굶주리는 일곱명의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체포돼 19년 감옥살이를 하며 세상을 증오한다. 가석방 후 이리저리 떠돌게 되지만, 전과자인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이는 없었다. 마침내 미리엘 주교가 그를 받아들여 숙식을 제공하는데 장발장은 성당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병사들에게 붙들린다. 장발장을 끌고 온 병사들에게 주교는 자신이 은식기를 주었다며, 오히려 장발장에게 ‘은촛대는 왜 그냥 두고 갔느냐’고 말했다. 이후 장발장은 선한 삶을 추구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는 타임(TIME), 라이프(LIFE),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같은 영어 잡지와 영어 신문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상대의 전신인 고상 출신인 아버지가 어쩌다 그렇게 영어에 심취하셨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당시 인텔리들은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학에 갓 입학해서였다. 아버지는 가끔 나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그랑프리가 영어로 그랜드 프라이즈지?” 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랑프리’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그래도 아는 척하며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얼버무렸다. 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다. “이상하다. 영어를 잘하시는 아버지가 왜 내게 그것을 물으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얼른 내 방에 들어가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랑프리가 영어로 그랜드 프라이즈(grand prize) 라는 것을 알고는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확인해 보라는  메시지와 딸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영자 신문을 불쑥 내밀면서 한 기사를 번역해 보라고 하셨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 나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아버지가 또 나를 테스트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낑낑대며 번역을 해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내심 잘했다는 칭찬을 기대했지만 그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셨다.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기사를 다시 꼼꼼히 읽었다.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서 궁색한 여자가 남편 덕에 여왕처럼 호화롭게 사는 여고 동창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가 수모를 당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여학생 때는 학교라는 울타리와 동일한 교복으로 인해 친구들 간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그 길이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특히 여성은 결혼을 잘하고 못함에 따라 인생행로가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딸에게 그런 여자의 운명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무언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지식과 깨달음을 얻고는 했다.       노자에 나오는 ‘불언지교(不言之敎)’는 말하지 않고도 가르침을 준다는 뜻이다. 소년이 시주함의 돈을 훔치려 했을 때 스님이 소년의 어깨를 잡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어 제어한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너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 때문인지 그 마음은 다 헤아리고 있다. 그러니 못 본 것으로 해 두마. 그러나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   용서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시 스님이 베푼 무언의 가르침과 용서가 자칫 빗나갈 뻔한 한 남자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현문 스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가르침 무언 시절 아버지 영어 신문 그날 스님

2024-10-10

[수필] 천국에서 온 편지

최인호 작가가 살았을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어딘지 아세요?” 잘 모르겠다고 하니 “머리에서 출발해서 가슴까지 오는 여행이지요.” 최 작가는 그 말뜻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에세이 모음 책인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어머니의 편지가 내 마음의 우체통에 도착하는데 꼬박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라고 고백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했던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 한 분이 최인호 작가일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의 소설이 신춘문예에 입상했다. 일간지에 연재된 ‘별들의 고향’의 엄청난 인기로 여기저기서 ‘경아’라 불리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어  ‘상도’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 작품들이 계속 흥행에 성공해 큰 명성을 누렸다. 그러다가 2008년, 63세의 나이에  침샘암 진단을 받았다. 다음 해 35년간 연재하던 ‘샘터’ 잡지의 ‘가족’을 비롯해 모든 집필을 중단했다. 그가 세상 떠나기 3년 전인 2010년에 출간된 ‘천국에서 온 편지’에서 그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속죄와 그리움으로 오열하는 최 작가의 모습을 330여 페이지 내내 볼 수 있었다. 필자도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속죄하는 마음에 크게 공감을 했다.     최 작가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1955년 48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편보다 한 살 어렸던 그의 어머니는 47세에 홀로되어 9남매를 키웠다. 딸을 두 번  낳고, 또 쌍둥이 딸을 두 번이나 낳아 딸만 6명이 되었는데 그중 세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남아선호가 심했기에 어머니는 시댁에 죄인처럼 사셔야 했다. 필자의 어머니도 딸만 셋을 낳았을 때 가까운 친척이 아버지에게 첩을 얻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으라고 말했다고 하니 어머니들이 받은 수모와 심적 압박감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 작가의 어머니는 7번째로 장남인 형을 낳고 필자의 어머니는 4번째 형을 낳게 되어 두 어머니는 비로소 한숨을 돌린 셈이다.   최 작가는 8번째로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임신 중독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생겨나 이북에 있던 그의 가족들은 사업차 남한으로 간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남하하려는 남동생을 따라 그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무작정 따라나섰다. 배가 너무 불러 지게를 거꾸로 타고 넘어왔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월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북에서 태어나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회상했다. 1945년 10월 출생 시 머리가 아주 커서 어머니가 출산에 무척 고생했다는데 그의 별명이 ‘남북대가리’였고 ‘대갈장군’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머리 크기가 다른 신체와 균형을 잡아갔다.   최 작가가 10살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혼자 가장 노릇을 하며 6남매를 먹이고 학교 교육을 시켜야 했다. 방 하나에서 모든  식구가 살고 남은 방 2개를 하숙이나 세를 주고 먹고 살아야 했다. 많은 식솔을 부양하러 어머니가 지독한 절약 생활을 할 때 최 작가는 불평하면서 학교 핑계로 어머니를 속이고 돈을 더 타냈다고 속죄한다.     필자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가 있던 아버지와 결혼해 8남매를 낳았다. 막내는 태어나자마자 숨져 7남매를 키우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은행 부도를 내서 집에는 세간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다.  고등학생인 넷째 누나는 큰누나네로, 중학생인 나는 둘째 누나네로 가서 몇 년을 얹혀살아야 했다. 집안 살림만 하셨던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고 시장 노점에서 꽃을 팔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으로 내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는데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최 작가는 어머니가 다리를 못 쓰고, 당뇨병 합병증으로 눈도 잘 못 보셔서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민속촌을 구경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손을 보니 쉴 새 없이 일해서 두터운 손의 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고했기에 자기는 엄청난 죄인이라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아들 된 도리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정말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이 끔찍하게 싫고 고통스러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하듯 비틀어진 다리를 십 분 정도 주무르고 "오마니, 갑니다. 안녕히 계시라우요"하며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 작가는 그의 어머니가 늘 쥐색 두루마기를 입고 멋과는 상관없는 구식할머니였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머리를 빗고 립스틱 바르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미소 짓는 게 낯설게 보여 그냥 찍으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타박했던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 영안실에서 여주인공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비록 평생을 낡아빠진 남루한 옷처럼 살아온 인생이지만 여성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안간힘을 무시하고 이를 박탈하려고 애썼던 내 태도가 실은 잔인한 고문이며 간접적인 살인행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늘 맛있는 것이나 좋은 옷을 싫어하는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자식들을 위한 배려였던 것을 어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최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시게 된 계기로 온 가족이 천주교를 믿게 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최 작가는 자기가 쓰던 천주교 묵주를 어머니께 드리고 대신 어머니 묵주를 유품으로 받았다.  최 작가는 외출할 때마다 오른쪽 주머니에 어머니의 묵주를 넣고 만지면서 언제나 어머니 손과 마주 잡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 손은 농부의 손이었고 광부의 손이었고 거인의 손이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제는 최 작가와 부모님 모두 천국에 계시므로 더는 천국에서 편지를 주고받을 일은 없고 함께 손을 잡고 낙원을 걷고 있을 것이다. 윤덕환 / 수필가수필 천국 편지 어머니 모습 그때 어머니 시절 아버지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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